고대 사벌국 관련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1996년    

<  상주시, 상주 산업대학교 부설 상주문화연구소  >

1.서   2. 조사경과  3. 조사의의 - 제언-  1. 선사유적(先史遺蹟)  1.  고분유적(古墳遺蹟) 및 기타 1. 금흔리 토광묘유적(도면1, 사진1 )

  

1.서

사벌국沙伐國에 관한 기록記錄을 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의 석우로조昔于老條에 "신라新羅 첨해왕 재임 沾解王在任(AD247~261)때 옛날 우리에게 속해 있었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신하여 백제百濟로 귀속하였으므로 우로于老는 장병將兵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討伐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량벌沙梁伐을 곧 사벌沙伐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겠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의 상주조尙州條에는 "첨해왕시沾解王時에 사벌국沙伐國을 취取하여 주州로 하였고, 법흥왕法興王12년(AD525)에 군주軍主를 두어 상주上州로 하였다.그리고, 진흥왕 眞興王 18년에 주州를 폐廢하였다가, 신문왕新文王7년에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리지地理志의 기사記事를 보면 석우로昔于老의 기사記事에 나타나는 사량벌국沙梁伐國은 사벌국沙伐國의 동명이기同名異記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벌국沙伐國을 취取해서 주州로 만들었다는 기록이나 사량벌국沙梁伐國을 토벌討伐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新羅 (사로국斯盧國)령領으로 되기 전까지는 사벌국沙伐國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新羅 가 주군현제도州郡縣制度를 지방地方에 설치하기 전까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상에 지역집단地域集團의 지명地名을 일국一國, 일벌一伐, 일성一城 등의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상주尙州 역시 상주上州가 되기전에는 사벌沙伐의"국國"으로 표기되었었다. 여기서 사벌국沙伐國은 신라新羅 (사로국斯盧國)에서 독립된 존재였고, 군현제郡縣制 이전의 국가성격國家性格임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어떤 형태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적遺蹟, 유물遺物의 정형定型은 여러 학자學者의 연구硏究가 있었음에도 아직 분명하지 못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에는 사벌국沙伐國과 비슷한 수준의 소국小國으로 비정되는 골대국骨大國,소문국召文國,감문국甘文局, 이서국伊西國, 압독국押督國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신라新羅 (사로국斯盧國)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사로국斯盧國에서 독립된 소국小國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3세기 경에 신라령新羅領이 된다.

A.D 3세기世紀는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이 기록되었던 시기이다. 이 기사記事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볼 수 없는 당시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경상도慶尙道에 위치한 변진弁辰에는 24개個의 소국小國이 있었고, 이들 소국小國은 큰 것이 4,5천호千戶가 되고 작은 경우는 6,7백호百戶이고,각국各國의 국읍國邑에는 통솔자인 거수渠帥가 있고, 또 소도蘇塗라 부르기도 하는 별읍別邑이 있고, 제사장祭祀長인 천군天君이 있다. 그리고, 이들 소국小國은 다수의 읍락군邑落群으로 구성되고 국읍國邑은 이러한 다수 읍락邑落 가운데서 중심되는 대읍락大邑落을 칭한다. 대체로 이들 각 읍락邑落은 정치政治,경제적經濟的으로 독립된 기능을 갖춘 소집단을 거느린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성책城柵이 있고, 철鐵을 생산해서 왜倭,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에 공급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분석,연구한 바에 의하면 소국小國은 국읍國邑의 주수主帥인 정치적 통솔자와 국읍國邑의 천군天君인 제사장祭祀長이 양립되어 있는 사회로서, 주수主帥의 정치적 권력이 아직 미성숙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또, 이 사회는 대체로 신라新羅 에 병합되기 전이라는 점에서 3세기경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고고학자료考古學資料에 따르면 기원전후부터 3세기경까지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 하여 청동기靑銅器와 함께 철기鐵器가 생산되고, 저구릉지대에 소성곽小城郭, 토성土城을 구축하고 토광묘土壙墓나 석곽묘石槨墓를 묘제墓制로 하는 문화기文化期이다. 이 문화는 고총高塚의 대형고분군大形古墳群이 조성되기 전단계前段階 문화文化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는 지표조사地表調査에서 얻은 문화유적文化遺蹟 가운데 위에서 설정한 문화단계文化段階 의 유적을 밝히는데 있다.

2. 조사경과調査經過

이번 상주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는 상주에 분포하는 각 시대의 문화유적과 유물 중에서 서론에서 설정한 문화단계의 유적을 조사하는데 있다. 그러나, 사벌국과 관련한 유적으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많지 않고 또, 관련하는 유적 가운데는  확정하기가 어려운 것도 있어, 일단 선사시대의 유적과 사벌국에 연속되는 고신라시대의 유적,유물까지 조사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조사대상을 시대적으로 확대하게 된 것은 고신라를 하한으로 해서 그로부터 선행되는 시대의 유적,유물을 정리한다면 사벌국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비교적 정확성을 기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 조사지역의 범위에 대해서는 사벌국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범위를 설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문헌상에서 짐작되는 지역과 문화유적들의 분포상태에서 개략적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구역은 낙동강의 지류인 병성천 하류역의 범람원 일대가 된다.   병성천 하류역은 병성천의 지류인 동천,북천,서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서 큰 규모의 정착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넓은 퇴적평야와 저구릉들이 형성되어 있는 자연환경지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유적의 분포도 병성천의 전유역 가운데 밀도가 아주 높고 규모가 큰 것들이 유존한다. 즉, 이러한 문화유적의 분포상태가 사벌국의 핵심체가 자리할수 있는 위치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 구역은 현재의 상주시역에 비한다면 극히 좁은 규모이다. 이번 지표조사를 이 좁은 범위로 한정하다시피 한 것은 조사여건상 어려움이 있고, 광역을 조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또, 유적의 분포상태에서 사벌국 실체를 규명하는 유적이라 추정되는 것이 이곳에 집결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광역의 상주에는 고령가야로 비정되는 함창지역이 있다. 이곳에도 대규모 고분군이 유존한다. 병성천 하역에 분포하는 고분군과는 어떠한 관계인지 알 수 없으나,이곳 고분군에서 도굴된 석실구조를 보았을 때 횡구식으로서 병성천 하류역보다 빠른 것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령가야로 비정할 수 있을 지 다시 생각해 봄직하다. 그러나 장차의 정밀조사를 위한 안내가 될 수 있도록 이번 지표조사에 포함시켰다.

결과적으로 조사구역은 행정구역상의 함창읍,구상주시,사벌면 외에 낙동면,중동면,이안면,공검면 일부를 포함하였다. 그리고, 이번 조사작업 과정에서 사벌국과 관련된 문화유적과 함께, 이 지역내에 분포하는 선사유적과 고대불적도 조사,기록하였다. 이번 지표조사의 조사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

고고학분야

책임연구원 :윤용진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현명예교수)

조사원:  최0선 (중승가대학 불교사학 연구소 연구위원 )

             김상영(중앙승가대학 불교학과 교수)

            정인성(대구교육대학교 박물관 조교)

            박윤성(상주문화원 사무국장)

           조曺희열(상주문화연구회 회원)

           류柳윤기(상주얼찾기 회원 )

조사보조원: 김형화( 전 경북대학교 박물관 연구원 현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전영준( 중앙승가대학 불교사학연구소 조교)

                 김한상(대구교육대학교 박물관 연구)외 다수

효율적인 조사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조사방법을 설정하여 진행하였다.

1. 조사지역은 행정구역상으로 구상주시, 사벌면 전역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함창읍,중동면, 낙동면, 이안면, 공검면 일부지역도 포함한다.

2. 조사는 우선 문헌상에 나타나 있는 사적을 확인하였다.

3. 유적의 조사는 사벌국의 사적을 최우선으로 한다.

4. 사벌국의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과 산성을 조사한다.

5. 사적은 1/25,000지도나,1/5,000지도에 위치를 표기하고, 상황을 기록하고 유물은 가능한 한 실측한다.

6. 문화유적을 지표조사를 통해서 정확히 현상을 기록한다.

7. 사벌국 영역을 비정하기 위하여 조사는 상주시역의 유적에서 주변은 확대해 나간다.

8. 사벌국 사적 외에도 선사유적과 고대불적을 함께 조사하고 기록한다.

조사는 선사,고분, 산성,불적등 4개 분야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고분과 산성분야는 윤용진 책임연구원 및 조사단 전원이 참가하여 공동조사하고, 선사분야는 대구교육대학교박물관에서, 불적은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에서 전담하여 조사하였다.

지표조사는 1월부터 3월에 1차적으로 실시하고, 얻어진 자료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미비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5월과 6월에 부분적인 2차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유적은 선사21개소, 고분18개소, 산성 6개소, 불적 18개소, 기타3개소 등 , 총66개소이다.

 

선사

고분

산성

불적

기타

비고

함창읍

2

4

1

2

 

9

사벌면

3

3

1

3

 

10

상주시

8

6

3

9

 

26

낙동면

4

1

 

3

 

8

중동면

2

4

1

 

 

7

외서면

1

 

 

 

1

1

공검면

1

 

 

 

3

4

이안면

 

 

 

1

 

1

21

18

6

18

3

66

보고서는 각 분야별 해당 조사원들이 담당하여 작성하였다. 그리고, 전체적인 도면도판편찬은 김영화가 도왔다. 원고는 해당분야별로 집필하여 전체적으로 윤용진이 감수하였다.

3. 조사의의

이번 조사를 통해서 구상주시와 사벌면,그리고 중동면,낙동면 일대에 청동기시대에서 고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이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의 존재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공검면에서 문화층의 부존가능한 동굴과 암음유적을 발견한 것이 큰 성과였다. <   나의 의견/ 상주는 외침과 전쟁다발지역이었으며 낙동강의 상류로서 큰 홍수가 나면 강의 범람과 침식이 많은 지역이기에 주로 강가에 거주한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굴의 가능성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상주지역의 당시 자연환경과 먹거리문화(식물,동물,어류,산림,기후,주거지,방어시설,무기등의 발달여부가 결정된다. 종족의 발달사,의식,종교와 세계관,... >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지석묘(고인돌)와 입석(선돌)이 대부분이고, 유물산포지등 생활유적은 극히 드물었다. 지석묘는 지표상에 상석만 드러난 형태로서, 개석식 지석묘에 속한 것들이다.

원삼국시대의 유적으로는 외서면 연봉리와 사벌면 이부곡토성, 그리고 신상리에서 무문토기,와질토기 산포지가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를 반영하는 유적은 고분과 산성이다. 상주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분군은 병풍산 산록과 함창의 산록에 분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동면 회상리에서는 석실 길이가 10m가 되는 수혈식 대형고분의 유존을 확인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을 열거하면 <별지도면>과 같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자료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사벌국의 영역을 추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번 지표조사에서 사벌면의 나직한 독립구릉상에 위치한 이부곡토성과 주변에서 원삼국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이 유적으로 보아, 사벌면의 발상지가 사벌면 금흔리의 이부곡토성을 중심으로 한 일원으로 추정되었다.  이부곡토성은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으로서, 토성 내.외에 후기 무문토기 유물과 원삼국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산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후기 무문토기유물로는 연질의 두형토기,우각형파수把手,점토대토기가 확인되었고, 상주시와 낙동면 일대에서도 확인되었다. 원삼국시대 유물로는 토광묘로 추정되는 유구에서 채집되는 적색,회灰흑색 경질의  승석문토기(繩席文土器)와 와질토기로서 토성의 전역에서 채집된다. 유물의 분포상태로 보아 토성 전역이 중심취락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자어> 승   繩 1.줄. 새끼;2.먹줄;3.법도;4.헤아리다;5.본받다;6.바루다. 바로잡다;7.바르다. 정직하다;8.경계하다;9.묶다. 결박하다;10.뒤를 잇다;11.기리다;12.성;13.알이 들다. 알이 배다;14.끝이 없다. 그침 없이 운동하다;15.노끈

2. 고총고분군과 산성은 삼국시대유적이나 사벌국에 연계되는 유적이다. 고총고분은 상주시의 병성산 북록일대에 넓게 분포하며, 중동면 회상리에도 규모가 큰 수혈식고분이 조사되었다. 병성리고분군은 상주지방에서 삼국시대 고분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고총고분군 이었다. 회상리고분군은 모두 봉분을 잃어 버려서 분포상태와 구조 및 규모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외 지역에서도 소규모의 고분이 다수 확인되나, 상주시 근역으로서는 이 병성산과 회상리고분군이 가장 밀집된 현상을 보인다. 전 고령가야의 유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함창읍 신흥ㅇ리 고분군은 분포넓이와 밀집상태, 규모 등에 있어서 외형상으로 상주시의 병성산고분군에 다음가는 규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주시 주변에서 확인되는 산성은 이부곡토성, 병성산성, 자산산성이다. 이들 산성은 모두 포곡식이고, 금흔리의 이부곡토성은 토축성이나, 병성산성과 자산산성은 토석혼용의 산성이다. 병성산성은 산성 아래의 산록과 능선상에 대규모의 삼국시대 고총고분군이 축조되어 있어 산성과 고분군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산산성은 일통삼한(통일신라)시대의 와편이 곳곳에 산포되어 있음이 확인되나, 고분군의 분포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산성조성의 시기가 일통삼한(통일신라)시대이후임을 추정케 하였다. 그외, 사벌국의 범위에서는 벗어난 지역이지만 갑장산산성,남산산성, 우물리토성 등도 이 기회에 조사하였다.

3.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사벌국 관련 유적은 이상에서 약술한 토성, 산성, 고분 및 유물산포지가 대표적이었다. 이 자료를 토대로 장차 정밀한 조사를 진행한다면 사벌국의 실체가 부각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4. 불적조사는 원칙적으로는 고대의 것에 한정하고, 상주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근역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번에 조사한 상주지역의 사지 중, 해발100m 내외에 위치하는 것이 많이 확인되었고, 대체로 일통삼한(통일신라)시대의 것이 많았다. 이는 이곳 지역은 빠른 시기에 이미 포교 활동이 성행하였음을 반영한다. 또한 신라사회에서 상주의 문화적 위치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 제언-

문화유산은, 그 지역과 민족의 역사적 화석으로서, 인간형성과 인류역사를 담은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따라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형성을 돕고 민족정신을 증진시키며 나아가  역사.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일조한다.

상주의 역사는, 지금까지의 지표조사상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의 생활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사벌국의 모태가 되는 취락의 형성도 이 무렵부터라 여겨진다. 이들 취락은 유적상으로 청동기시대 말기가 되면 병성천 일대에 큰 취락으로 형성되어, 정치적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추이를 상징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금흔리 이부곡토성이 된다. 이부곡토성은 곧 사벌국의 치소이다. 그 후 신라에 병합되는 삼국시대가 되면 병성산성과 병성산 고총고분군을 비롯해 자산(자산)산성등의 유적으로서 상징되는 신라의 한 강력한 지역 집단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일통삼한(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상주의 치소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유적은 사벌주의 방리구획유적이 된다. 한편 상주 일원에 고대 사찰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신라시대에 상주가 상주의 치소로서 큰 역할을 하였음을 반영하는 유적이 된다.

상주의 지역특징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내일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은, 사벌소국의 문화유산인  이 곳의 유적과 유물을 얼마나 잘 보호하여 다음 세대로 전하는가 하는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고 본다. 이같이 중차대한 상주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금흔리 이부곡토성, 병성산의 산성과 고총고분군, 자산산성, 회상리 고분군,오봉산 고분군 등과 상주 일에 분포하는 고사찰지를 더 이상의 훼손없이 보존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보존책 마련에는 필히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이 지역 고유의 문화유산을 역사경관과 더불어 충실히 간직하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의 문화유적지표조사만으로써도, 국사나 향사 및 제문헌상에 단편적으로 나타는 사벌국에 접근할 수 있다. 유적분포상으로는 금흔리와 화달리 일대가 그 역사.문화의 진원지가 되어 병성,자산(구상주시)등지로 문화권을 확대해 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지표조사의 효과를 위해서 앞으로, 앞서 언급한 산성과 고분군, 고사찰지의 보존책을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 우선은  유적의 훼손이 더 이상 없도록 시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이들 유적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정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 특히 사벌소국의 중심취락지로 추정되는 금흔리 이부곡토성에서 화달리 전사벌왕릉, 병성동 고분군 일대는 역사경관을 보호하고 개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상주는 96년도부터 문화유적의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시 당국은 이 지역에 무수한 발굴작업이 전개될 것에 대한 대비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특히 명심해야 할 일은 상주의 문화유산은 상주의 참모습이자 영구한 생명인 만큼 현장에서 보존,계승되어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향토자료관 내지 박물관 건립이 추진되어야 한다. 끝으로, 도시계획을 위한 국토개발에 있어서도 상주의 역사경관과 자연경관을 보존하면서 계획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선사유적(先史遺蹟)

이번 지표조사에서는 상주지역, 특히 사벌면과 구상주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과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상주지역에서 확인되는 가장 빠른 선사시대의 유적은 지석묘였다. 이 외에 무문토기 산포지 및 입석유적이 확인되기도 하였지만 지석묘 유적이 가장 많았다.  한반도에서 지석묘의 축조시기가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지표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지석묘 유적의 존재의 보아, 상주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청동기시대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겠다.

상주지역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몇 개의 군으로 되어 있다. 이 중 회상리 지석묘 1 은 군집을 이루는 것으로 상주지역에서 확인되는 지석묘군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부언동 지석묘도 일정한 면적에 군집을 이루고 있기는 하나 회상리 지석묘 1에 비하여 개개 상석의 크기나 기수에 있어서 뒤떨어진다. 상주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외형상으로 북방식은 없었다. 그리고 상석이 지표 위에 얹혀 있는 것을 대상으로 확인해 본 결과, 상석 아래에서 지석이 확인되는 것이 드물었다. 상주지역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5 내지 10여기의 지석묘가 군집을 이루는 형식이고, 개석식 지석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석묘 유적의 입지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구릉사면이거나,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소하천변에 형성된 평지와 야산의 구릉사면이 많다.  상주지역에서 확인되는 무문토기는 후기형식의 무문토기를 제외하고는 기형을 알수 있는 것이 없다. 대개가 동체나 저부의 소편이기 때문이다. 상주지역에서 확인되는 후기형식의 무문토기는 금흔리 토성 및 금흔리"바람밭고개"유적의 주변에서 발견되는 것들로서 기형은 주로 두형토기류이다. 이들 후기형식의 무문토기는 대개 와질토기나 경질의 타날문토기(打捺문토기)와 공반해서 출토되고 있다. 이를 통해 유적의 존속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상주지역은 이외에도 일찍부터 청동기의 출토예가 알려져 있다. 상주에서 출토되었다는 청동기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세형동검(細形銅劍) 및 이와 관련된 청동유물이다.  상주 출토청동기는 결입부가 없는 세형동검(細形銅劍)2점, 결입부와 등대마디를 가지는 전형세형동검 2점이 일괄유물로 보고되어 있다. 팔주령(八珠鈴)과 간두령(竿頭鈴)을 포함한 일괄유물의 출토예가 있다. 늦은 형식의 청동유물로는 망치형동기를 포함하는 이형동기류(異形銅器類)와 한식동경(漢式銅鏡) , 그리고 세형동검(細形銅劍),동모(銅金牟)가 일괄로 출토된 바 있다. 이들의 출토지는 전(傳) 상주(尙周)로 되어 있고, 낙동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이 많다.1)   1)소전부사웅(小田富士雄).한병삼(韓炳三), <한일교섭의 고고학>, 육흥출판(六興出版),1991. 윤무병(尹武炳),<한국 청동기문화의 연구(韓國 靑銅器文化의 硏究)>, 예경산업사(藝耕産業社),1992

한자어 >    1.누르다. 찍다;2.파임; 날,  金牟 칼끝 모

상주지역에서 채집되었다는 청동유물중에서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주지역도,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낙동강의 상류역임에도 다른 지역권과 격리되지 않고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형동검(細形銅劍)사용 단계에서는 낙동강 유역권내에서도 아주 선진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청동기의 출토량에 있어서 경주나 대구, 그리고 김해 등지와 필적할 만하다는 것이다. 또 낙동강 권역에서 출토된 의기성 동기, 즉 팔주령등의 유물은 낙동강 유역권 가운데서도 상주지역이 금강유역권의 청동유물형식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아 세형동검 단계에 있어서 이 지역과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이곳 낙동리에서 출토된 한식거울은 전한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유행하던 형식의 것이다. 망치형동기나 우각형동기 등의 이형동기는 낙동강 하류역의 다호리나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2)  2)이건무(李健茂),이영훈(李榮勳),윤광진(尹光鎭),신대곤 (申大坤),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진전보고(1)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1)>, <고고학지(考古學誌)제10집>第10輯,고고미술연구소(考古美術硏究所),1989.

이러한 이형동기(異形銅器)는 일본(日本)의 대마도(對馬島)에서도 출토예가 보고된 바 있다.3)    3) 장기현(長崎縣) 교육위원회(敎育委員會), <대마(對馬)>,장기현(長崎縣) 문화재조사보고 제17집( 文化財調査報告 第17集  ),1974.

이러한 사실은 상주지역에서 채집된 세형동검과 이와 관련되는 청동유물의 특성이 세형동검 단계에 이르러서, 낙동강 유역 내의 다른 집단은 물론 한반도 외의 다른 지역권과도 교류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한경(漢鏡)의 편년으로 보아 BC2세기 후반에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직.간접적으로 교류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도면 1. 상주지역 출토 세형동검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상주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러한 청동기들은, 상주지역에서 성장한 초기 사벌국의 실체를 잘 반영하는 유물이라고 판단된다.  이상으로 보아 상주지역의 사벌국은 늦어도 BC2세기 후반에 낙동강 유역권에서 하나의 정치세력권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면 2. 상주시 낙동면 출토 각종 청동유물

1.  고분유적(古墳遺蹟) 및 기타

상주지역을 거점으로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사벌국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기적으로 삼한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BC2세기 말에서 AD3세기 경까지의 시기에 조성된 유적이 이에 해당한다. 1)   

이번 지표 조사결과 삼한시대의 유적으로 판단되는 곳은 금흔리의 후기무문토기, 와질토기가 출토되는 유물산포지와 토광묘유적, 신상리의 와질토기 출토지역,상주시 화산동의 후기무문토기유적이 전부이다. 2)     

이 중 가장 주목되는 곳은 금흔리 이부곡토성의 주변과 바람밭고개라 불리는 이부곡토성 동쪽 하단부의 구릉에서 확인되는 토광묘 유적과 후기무문토기 유적이다. 이부곡토성은 그 면적과 토루의 규모가 대구의 달성산성이나 경주의 반월성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규모이다. 토성의 내외에서는 후기무문토기와 와질토기, 그리고 각종 타날문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들이 채집되었다. 출토된 유물과 토성의 연대를 동일하게 본다면 삼한 초기단계에 토성이 축조되어 삼국시대까지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채집된 유물의 층위나 상호공반관계를 알 수 없으므로 성(城)의 사용시기도 분명히 할 수는 없으나, 입지조건이나 토루의 형태로 볼 때 축조연대가 삼한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병성천 유역에서 가장 고성(古城)이고 유일한 토성이다. 따라서 삼한소국의 하나인 사벌국은 중심거점을 이부곡토성으로 하는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삼한의 하한은 대개 AD3세기 경으로 비정되고 있다. 하지만 사벌국을 포함한 독립적인 세력으로서의 지방소국의 자율성은 신라의 군현제가 시작되는 시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삼한시대의 유적은 아니나 삼국시대에 조성된 고분유적의 분포와 성격을 확인하는 것도, 이 지역 사벌국의 성격이나 집단의 중심거점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구 상주시와 사벌면, 그리고 함창지역의 삼국시대 고분유적에 대한 조사를 병행하여 실시하였다.

고분유적에 대한 조사결과 가장 넓은 분포범위와 대형의 분구들로 조성되어 있는 유적은 함창의 신흥리고분군과 병풍산 일대에 조성된 병성동 고분군이었다.  이 외에도 상주지역에는 곡간의 곳곳에 많은 고분군이 분포한다. 특히 중동면 회상리에는 분구가 남아 있지 않으나 대형의 수혈식(竪穴式) 석실분이 확인되며, 지천동와 우물리 등지에도 규모가 큰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고분군에 대한 조사결과 상주지역에서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지역집단은 병성동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과 신흥리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두 지역집단 가운데 신흥리고분군은 이안천 유역의 범람원을 바라보는 오봉산의 구릉상에 분포하고, 병성동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병성천 유역의 범람원을 그들의 생활터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표조사 자료만으로는 두 집단간의 상호관계를 추론하느 것이 용이하지 않지만 각 고분군의 석실형식이 지극히 유사하다는 점과, 두 집단 사이에 특이할 만한 방어시설 따위의 경계가 확인되지 않는 점은 고분 축조시기에 이들 집단간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점이 있다.

이번 지표조사에서 부각되는 점은 삼한,삼국시대 유적의 분포와 그 성격으로 보아 상주지역에 존재했던 사벌국은 이부곡토성 및 그 주변이었고, 고분 축조시기에 병성동 고분군이 분포하는 병성천 하류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집단은 고분의 축조연대를 보아서도 최소한 6세기 후반대까지 어느 정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  한반도의 남부지방에 위치하였다고 믿어지는 삼한소국의 상한 및 하한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일단<후한서後漢書>의 한전(韓傳)이나<삼국지三國志>의 한전(韓傳)을 통해보면 BC3세기에 이미 한족(韓族)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지망인 秦之亡人 피고역避苦役 적한국適韓國 마한할계馬韓割界  동계여지東界與之."        " 주입해走入海  거한지居韓地  자호한왕自號韓旺 ."  

고고학적인 자료의 해석을 통해 삼한의 상한을 정하고자 한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은 대개 토기의 변화나  세형동검(細形銅劍)의 등장, 혹은 철기를 포함하는 낙랑유물의 발생연대들이 있다.

신경철은 무문토기의 변화를 통해 삼한의 상한을 BC3세기로 보았으며, 김영민도 삼한과 세형동검의 관련성을 들어 BC3세기를 상한으로 보고 있다.   최근 권오영은 삼한의 상한을 BC1세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결국 어떠한 문화요소의 변화를 삼한사회의 형성시기를 말하는 지표로 삼을 것인가가 문제이겠으나 외래계 청동유물이 본격적으로 이입되고 낙랑을 통해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각종 철기나, 척기유물, 그리고 오수전(五銖錢) 등의 화폐류가 확산되는 시기를 상한으로 삼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삼한사회의 상한은 최소한 BC2세기 말까지는 소급될 것으로 판단된다.

김영민(金榮民),<영남지역 삼한 후기문화의 특성과 지역성 (嶺南地域 三韓 後期文化의 特性과 地域性) >, 부산대학교 문학석사학위논문,1996.

권오영(權五榮), <삼한(三韓)의 국(國)에 대한 연구(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학위논문,1996.

2)   이 중 신상리 후기무문토기,와질토기 산포지, 그리고 상주시 북쪽의 현 상주종합운동장 근처의 후기무문토기유적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보고된 바 있으나, 이번에 재조사를 실시한 결과로는 유적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중원문화권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中原文化圈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 -상주시尙州市.상주군尙州郡,1988.

1. 금흔리(錦欣里) 토광묘유적(土壙墓遺 蹟)(도면1, 사진1 )

1)위치: 상주군 사벌면 금흔리 일대

2)시대: 삼한

3)찾아가기: 상주시에서 대구로 가는 25번 도로를 따라 외답동"논실앞 주막"마을에 이르면 병성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갈림길을 따라 병성잠수교를 건너서 계속 가다보면 전 사벌왕릉에 이른다.  사벌왕릉이 있는 화달리에서 북으로 2km를 더 가면 왼으로 이부곡토성이 나온다. 또한 토성에서 뻗어내린 구릉이 도로의 건너까지 이어져 형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잇다. 토광묘(土壙墓) 유적(遺蹟)은 도로의 동쪽에 형성된 낮은 구릉상에 위치한다.

4)현황: 금흔리 (錦欣里)토광묘(土壙墓) 유적(遺蹟)은 주변지점에 비해 높지 않은, 즉 경미한 경사로 이루어진 작은 구릉상에 위치한다. 구릉은 비교적 작은 소나무들로 뒤덮혀 있으며 곳곳에 민묘(民墓)가 조성되어 있다. 주변에 민묘를 조성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잔디를 파낸 흔적이 확인되며, 군데군데 유물이 노출되어 있다. 자연적인 혹은 잔디를 파내는 과정에서 일부 훼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도굴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유적이다.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평면 토광선을 확인해 본 결과 유구(遺構)는 폭이 100cm내외의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채집되는 유물은 주조철부(鑄造鐵斧)와 와질제(瓦質製) 주머니호, 그리고 개신(蓋身)이 깊은 경질무문토기 뚜껑이 있으며 각종 무문토기 소편(無文土器 小片)과 와질토기편(瓦質土器片)들이 채집되었다.

한자어> 鑄  주 1.쇠를 부어 만들다. 주조하다;2.감화 도야하다. 인재를 양성하다;3.녹. 쇠의 거죽에 생기는 산화철;4.나라 이름,   斧  부 도끼.도끼;2.베다. 도끼로 베다;3.도끼의 무늬. 자루 없는 도끼 무늬를 그리거나 수 놓은 천. 그 천을 발른 병풍, 蓋  개 덮을

5) 채집유물: 금흔리 토광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중 실측이 가능한 유물은 주조철부(鑄造鐵斧),주머니호, 경질무문토기 뚜껑이다.

 1)무문토기 뚜껑(도면2-1,사진 1-4 )         개신(蓋身)이 높은 무문토기 뚜껑이다. 뚜껑의 꼭지는 오목하게 파여 있으며, 하향하면서 나팔상으로 넓게 벌어지는 형태를 하고 다. 개신(蓋身)의 끝은 약간 들려 있다. 개신의 내,외면(內,外面)에는 손눌림흔적이 가볍게 남아 있다. 태토에는 굵은 석영립이 다수 섞여 있으며 색조는 외면이 적갈색을 띠며 내면은 흑갈색을 띠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성도가 높은 편이다.  토기는 대개 BC1세기대로 편되는 것이다. 기고(器高): 5.6cm, 최대경(最大徑):12.7cm

 2) 주머니호( 도면2-2, 사진1-2 )   와질제의 주머니호이다. 구연부의 끝은 거의 수평에 가깝게 외반한다. 구경부에서 동체로의 진행은 동 최대경까지 급격히 벌어졌다가 다시 동일한 곡률로 축약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벽은 얇고 표면이 일부 박리(剝離)되어 정면기법을 살피기는 어렵다. 태토는 미울질이 거의 없으며 전체적으로 회백색을 띤다. 파손이 심한 것을 도면복원하였다.   복원고: 12.9cm, 복원 최대경:21cm

 3) 주조철부(鑄造鐵斧) (도면 2-3, 사진1-3.5 )  주조제(鑄造製)의 철부(鐵斧)이다. 평면형태는 기본 장방형에서 인부(刃部)가 약간 넓어지는 형식이다. 단면의 형태는 각이 지는 장방형이며 부(斧)의 형태 또한 장방형(長方形)이다. 부(斧)에는 목질이 부식되어 고착된 채 남아 있다. 표면에 약간의 철녹이 붙어 있으나 대체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전체길이: 10cm, 인부폭:4.8cm, 공부폭:3.4cm

한자어> 刃   인  1.칼날. 칼의 날;2.칼. 칼질하다. 베다;3.병기의 총칭

도면1. 금흔리 토광묘 유적 위치도 (1/5,000)      도면2. 금흔리 토광묘 채집유물

금흔리 토광묘 유적은 시기적으로 이부곡토성과 연계되어 사벌국의 문화적 성격과 특성을 확인시켜 줄 중요한 유적이다. 다행히 유적의 존재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아 도굴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있지만, 도굴꾼들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유적임에 틀림없다. 일정구간을 선정하여 학술조사를 실시하고 보존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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