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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과 애노의 혁명 革命(일명 원종과 애노의 난)   서기 A.D.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혁명(일명 난亂)

이들은 실제 성씨는 기록이 되어 있지가 않다. 그러나 이름만 원종과 애노이다. 이들의 활동은 한반도 최초의 조직적인 농민혁명으로서 이후 역사의 혼란기에 한 줄기 빛으로 되새김 되어져 오고 있다. 권력과 탐욕에 굶주린 승냥이가 아닌 오로지 생존욕구,생명을 유지하고자 무자비한 약탈에 저항한 순수한 농민혁명이었다. 발해(渤海),일통삼한의 신라와 고려,이씨조선,갑오경장, 동학혁명, 독립혁명, 3.1운동, 6.25한국전쟁, 등 모든 역사의 하부의식속에는 언제나 정의를 추구하여 가는 내재된 의식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아래는 그의 기록이 전하는 바 부족한 기록을 다시 되새겨 놓는다.

ㅇ     원종과 애노의 혁명 전사

신라 혜공왕(惠恭王36대代때부터 왕위쟁탈王位爭奪이 시작되면서 신라하대가 시작된다. 중앙의 귀족들은 재부財富의 증식增殖에 열을 올리면서 부를 이용한 정권탈취政權奪取에 필요한 사병私兵을 양성하였다. 예를들면 헌덕왕憲德王 14년(822)의 김헌창金憲昌의 난亂과 흥덕왕興德王이 죽은뒤(838)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제륭悌隆과 균정均貞의 싸움 등으로 골육상전骨肉相戰이 연속되었고, 말기 진성여왕眞聖女王때에 이르러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빈곤으로 중앙의 정령政令이 행해지지 못하여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봉기蜂起하여 신라의 군사조직은 저절로 무너지고 말았다.

신라말 이러한 혼란기에 지방호족地方豪族들은 일정한 지역에 실질적인 지배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대代를 이어가며 이를 행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보통 자기의 근거지에 성城을 쌓고 그 주인으로 자처하여 성주城主라 칭하였고, 그 성城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병을 지휘하기도 하여 장군將軍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했다.  이들 호족은 자기 세력권 안에 있는 촌락村落들에 대하여 경제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촌민에게 일정한 조세租稅와 력역力役을 부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호족들이 실질적으로 군현郡懸의 장관長官을 대신하는 지위를 차지하게 됨으로 군현제도郡懸制度는 공동화空洞化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 조정은 폐쇄적인 정책으로 경주중심주의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낙동강 서북쪽의 경북지역은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점차 경주중심에 대한 반발심이 커져 갔다. 진성여왕 3년 조정의 공부독촉貢賦督促에 반발하여 일어난  농민반란(혁명)은 끝내 신라를 멸망시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그 반란(혁명)의 봉화를 쳐든 것이 상주지방의 원종과 애노였다. 이들은 사벌주(상주)의 주성州城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은 내마奈麻,영기令奇에게 명하여 도적을 잡게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주성에 당도한 영기는 적의 성주城主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진격하지 못하고, 촌주村主우운祐運은 역전하였으나 전사하고 만다. 그뒤의 전황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왕명에 의하여 출장한 장수가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은 그 세력이 강성했을 뿐아니라 중앙군이 미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은 패전한 영기를 사형에 처하고 10세된 우운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었다.

신라의 지방행정 및 사회상(  新羅의 地方行政 및 社會相  )

일통삼한의 신라지방행정조직은 장관長官인 도독都督(주州),태수太守(군郡),영令(현縣) 등은 중앙관리가 배치되었으나 말단정치단위末單政治單位인 촌락村落에는 지방출신인 토호土豪들에게 촌주村主가 임명되고 그를 보좌하며 지방행정의 실무를 맡아보는 관리가 있었다.

촌락에 포함된 가족家族(대가족大家族)공동체共同體는 호구戶口의 우열優劣, 다시말하면 조세租稅 담당 능력에 따라 9등분(九等分)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진성여왕 3년( 889)이다. 호족출신 豪族出身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들이 상주尙州를 중심으로 먼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중앙군인 내마奈麻,영기令奇가 적세賊勢에 눌려 싸우지도 못했는데, 촌주村主 우운祐運이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한 사실은 결국 지방세력과의 싸움이 되었고, 반란군을 진압한 것은 지방 촌주중심의 세력이었기 때문에 우운의 아들이 아비의 전사한 보상으로 10세의 어린 나이에 촌주로 임명된 것이다.

상주출신尙州出身의 견훤甄萱이 후백제왕後百濟王으로 자칭하여 큰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상주尙州는 그 세력안에 들게 되었고, 아자개阿慈介, 아자개 阿玆蓋 등의 활동은 반신라세력 反新羅勢力이 크게 활동한 지역으로 보아진다.

신라말 혼란기를 당하여 후백제,신라, 고려의 각축전角逐戰이 벌어진 틈바구니에서 상주尙州의 백성들은 혹심한 수난속에서 연명해 왔을 것이다.

참고>

희양산문은 고려 태조 때 긍양(兢讓:878~956)이 사벌주(상주 가은현(경상북도 문경(聞慶)) 봉암사(鳳巖寺)에서 개산했다.

 봉암사 [ 鳳巖寺 ]     사벌주(상주)가은현-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加恩邑) 원북리(院北里)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절.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 : 879년 창건자 : 지증 소재지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희양산문은 고려 태조 때 긍양(兢讓:878~956)이 경상북도 문경(聞慶) 봉암사(鳳巖寺)에서 개산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로 879년(헌강왕 5) 지증(智證:智詵)이 창건하여, 희양산파(曦陽山派)의 본거지가 되었다. 고려에 들어와 935년(태조 18) 정진국사(靜眞國師)가 재건하였다. 조선시대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74년(현종 17) 신화(信和)가 중건하였다. 보물 제169호인 삼층석탑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 적조탑(寂照塔)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 적조탑비 ·보물 제171호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72호인 정진대사 원오탑비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참선승방으로, 사찰을 초파일에만 개방하고 있다.

경북 문경군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지증도헌(智證道憲)이 개창한 북종선(北宗禪) 계열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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